NO Pile ;block

작가 : 이장섭
소 : 빛 갤러리
일시 : 2006년 12월26일(화) - 2007년 1월12일(금)

 

작가노트

block - arrangement (set in arry)
city scape (space)
grid                                               

[Tetris=block]
Tetris라는 게임을 만든 사람은 러시아 과학자 알렉스 파지노프이다. 테트리스는 1985년, 러시아의「모스크바 아카데미」연구원이었던 알렉세이 파지노프(Alexey Pajitnov)가 고대 로마의 퍼즐인 펜타미노에서 착안하여 만들어낸 게임이다.
이 게임을 거의 안 해 본 사람이 없을 것이다. 4개의 각기 다른 블록들이 아래로 차곡차곡 떨어지고, 빈틈이 없이 쌓게 되면 쌓인 층들은 모두 사라지게 해서 점수를 올리는 게임이다. 사람들의 대부분이 '테트리스' 하면 떠오르는 것이 블럭 쌓기이다.
게임의 배경에는 춤추는 병사와 사원 같은 건물의 그림이 나온다. 그 건물은 성바실리 성당이다. 이 성당은 이반 뇌제[Ivan the Terrible ; 재위:1533-1584]가 몽골족 카잔 칸을 항복시킨 것을 기념하여 짓도록 한 건물로 1555-1560에 걸쳐 완성되었다. 붉은 광장 입구에 위치한 47m높이의 양파머리 지붕과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여덟 개의 양파머리 지붕들이 성 바실리 사원이다. 그것들은 대칭으로 잘 조화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제멋대로 솟아 있는데 오히려 이런 불균형이 멋진 조화를 자아내고 있다. 어떤 각도에서 보아도 8개의 탑이 보이도록 설계된 것이 특징이다. “성 바실리 사원”은 러시아 최고의 건축물로 불릴 정도로 화려한 외관과 독자적인 양식을 자랑한다. 이처럼 기기묘묘한 건물을 설계한 사람은 포스 토닉과 바르마 이다.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사원의 아름다움을 전해 듣고, 이반 뇌제에게 그 사원을 지은 건축가들을 영국으로 보내달라고 했는데, 이를 거절하지 못한 이반 뇌제는 그들을 도중에서 장님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반 뇌제는 이 사원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다른 곳에 이런 사원을 짓지 못하도록 두 건축가의 두 둔을 뽑아버렸다고 한다.

게임의 블럭들은 매우 단순하지만, 쌓은 과정에 오차가 생기면 빈 공간이 생기고, 그 빈 공간으로 인해 블럭들은 쌓이기 시작한다. 서론부터 테트리스게임을 얘기한 것은 이 게임의 방법의 형태와 그 수학적인 배치가 우리나라 도시의 블럭의 형태가 저 컴퓨터 게임과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블럭을 쌓는다는(pile) 것은 개발이나 좀 더 나은 환경을 위해서 도시를 구축한다는 것인데, 이상하게도 여기 도시는 조화를 생각해 볼 수도 없고, 역사의 이름을 새겨줄만한 미적인 것도 아닌 그 무엇도 아닌 이상스럽게 복잡하기만 한 지형을 그린다.

시선은 도시를 향하게 되어 있다. 우리들은 매일 도시를 걷는다. 블럭의 단위는 하나의 구역을 지칭하지만, 그 블럭안에는 역사의 층위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그리고 그 블럭의 집합들은 도시의 지도를 그린다.
나의 작업은 현재 우리나라 도시의 구조에 대한 형태와 그것의 생성과 소멸에 대한 시각에서 출발한다.

- I walked around the block -
작업은 도시에서 도시로, 구(區)에서 구(區)로, 거리에서 거리로 옮겨 다니며, 블럭의 생성과 소멸에 대한 나라의 단면을 관찰하고 그 관찰됨의 결과를 표현한다. Block의 작업은 항상 도시의 다른 것, 지역에 대한 커다란 것을 잘라낸 파편이며 대상의 배열에 대한 탐험(探險)이다. 모든 블럭들은 이름의 유래가 있다. 그 유래의 미시적인 역사는 현재 그곳의 상징물만이 지나가버린 시간을 대변 할 뿐, 이곳은 예전의 그곳이 아닌 곳으로 탈바꿈되어진다.
차를 타고 고가도로를 달리면, 멀리 있는 도시의 빌딩은 천천히 스쳐 지나가고, 가까이 있는 빌딩은 뇌에 저장되지 않을 정도로 아주 빠르게 움직인다. 나는 움직이지만, 나와 주변은 빠르게 달리는 것 같지만, 멀리 있는 지역의 정지되어 있는 느낌은 도시의 생성과 소멸의 느낌을 은유적으로 전달해 준다.

근현대사를 통틀어 우리나라 도시의 탄생이 전통을 계승하거나 철저한 시스템의 검증에 대한 통찰 하에 만든 게 아닌, 욕망이 시스템을 눌러 버리는 돌연변이 같은 구조의 도시임을 여기 서울에서 극적인 시나리오가 나날이 준비되어 진다. 각 지역의 신도시들과 현재의 구(區)에서 부동산 뉴스와 함께 예정된 지역은 공간과 시간을 모조리 뒤집어엎기 시작한다. 하지만 완성되는 것은 없다. 단지 생성될 뿐이다. 생성은 다음에 대한 소멸을 부른다. 그 다음은 내가 이곳에 없는 시간일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도시 구조는 특이하게 중점적으로 부동산에 의지한 분열과 융합을 반복하고, 그것에 대한 욕망의 앞선 물질화가, 통제나 인간 삶의 계획에 대한 도시의 형성이 아니라, 그 내부에 대한 평형과 크기로 나타나고, 그 블럭들의 집합체는 세계에서 볼 수 없는, 제일 독특한 색과 형태를 띠게 되어 실체와 출처가 모호한 상황을 연출한다. 또한 건물의 배열은 시선방향이 제각각 어긋나고, 길의 구부러짐에 따라, 자투리땅의 공간지형의 생성에 따라 들어서는 빌딩들은 도시계획이라는 연출을 라이브쇼처럼 실시간으로 보여준다. 이것이 개성인지 아니면 욕망의 모호한 대상인지는 모르지만, 그 생생함이 미술적인 형태의 즐거움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이 연출됨이 내 작업의 표현요소이고 contemporary 안에 있는, 독특한 면과 형태들의 시간(time)적인 집합체들의 표출이, 시각(visual)적인 작업요소의 흥미를 가져다준다. 하루아침마다 융합하고 차이와 반복을 만들어 내고, 공간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전자회로도의 지도처럼 나는 도시를 하나의 crossover를 넘어 생성과 소멸의 동시다발적인 형태를 관찰하고 표현한다. 그것은 공(空) 또는 temporary 이기도 하다. 서울이란 도시는 계속 분열과 융합을 반복하는 생물(生物)과 더 유사하다.

의심을 하기 전에 우리는 한번 쯤 시간을 가지고 고향에 가보면 그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그곳은 동(同)에서 이제는 블럭(block)이라는 코드의 숫자를 매겨줄 새로운 공간이 연출되어지고 있다.

이장섭(작가)

작가 홈페이지 www.jangseop.com

 


BLOCK
공간의 블록과 시간의 블록

평론- 김진영

1. <공간-장소-블록>:

1.1. “세상은 공간으로 이루어진다 [G. Simmel, ‘다리와 문].” 이 사실은 ‘공간’이라는 단어가 인간들의 영역, 문명과 문화의 영역에 대한 이름임을 말해준다. 예컨대 미개척의 정글이나 황무지는 아직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아직 인간의 터전으로 편입되지 않은, 인간의 삶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 기하학적 구획과 경계를 지니지 못한 무질서의 자연일 뿐이다.

1.2. 공간은, 그것이 인간들의 영역이므로, 역사를 내포한다. 공간의 역사는 공간 안에 ‘장소들’이 형성되면서 만들어진다. 장소는 특정한 공간과 그 공간 안에 거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맺어지는 관계들이 축적된 곳이다. 장소에는 사람들이 그 공간 안에 거주한 흔적들이 있고 (“거주한다는 건 흔적을 남긴다는 것이다”, 라고 벤야민은 말한다. W. Benjamin, Paris Passage) 그 흔적들은 그 장소의 특별한 이름 속에 아카이브의 자료들처럼 저장되어 있다. 종로(鐘路), 잠실(蠶室), 송도(松都)... 이 장소의 이름들이 내포하는 건 특별한 지리적 조건 혹은 생활적 조건에 대한 정보만은 아니다. 장소의 이름들 속에는 사람들이 그 공간에 투사한 집단적 꿈, 생활의 내력, 세대를 겹치면서 전승되는 그러나 역사로 기록되지 않은 미시사가 저장되어 있다.

1.3. 도시는 물론 공간이다. 하지만 도시의 역사는 공간 속에서 장소들이 해체되고 소멸되어가는 과정의 역사이기도 하다. 근대화 이전 소도시 속에는 장소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근대화 이후의 대도시들, 후기 자본주의 이후의 국제도시 혹은 메트로폴리스 속에 장소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장소들이 사라진 자리에 ‘블록들’이 태어난다. 블록은 자본주의적 공간의 개념이다. 블록은 공간을 더 이상 질적인 개념으로 보지 않는다. 공간은 크기와 넓이 혹은 높이로 측정되어 그것이 경제적이든 문화적이든 교환가치의 증폭을 위해서 계량화 된다. 장소가 공간과 사람 사이의 질적인 관계라면 블록은 그 둘 사이의 수량적 관계를 보여준다. 그래서 장소에는 이름이 있지만 블록에는 이름 대신 숫자가 있다. 거리이든 집이든 블록은 숫자로 구획되고 불리우고 교환된다.

2. <외시-공시-응시>:

2.1. R. 바르트의 기호론적 분류에 기대자면 사진은 3개의 층위로 이루어진다. 사진이 보여주고 우리가 눈으로 확인하는 직접적 이미지의 층위인 외시적-정보적 층위 (Denotation), 그 이미지의 수사학을 통해서 (선택, 구성, 장식 등등) 혹은 이미지를 독서하는 문화적 습관에 의해서 송신되고 수신되는 메시지의 층위인 공시적-상징적 층위 (Connotation),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진 이미지에 부속된 일체의 코드 관계로부터 자유로운 탈코드적- 제3의 의미 층위 (Insignifiance)가 그것이다.

2.2. 이 장섭은 세 장의 사진을 보여준다. 그 사진들의 외시적-정보적 층위는 분명하다. 사진들은 모두 도시의 블록들을 보여주지만 그 블록은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니라 이제 조성되려고 하는 미래의 거주구역들이다. 물론 중앙에 위치한 종로는 아직 건물들로 밀집해 있지만 그 또한 철거를 기다리고 있다는 점에서 좌우의 텅 비어있는 사진들과 다르지 않다. 우리가 세 장의 사진에서 보고 확인하는 외시적-정보적 층위, 그건 빈터다. 사진들의 공시적 -상징적 층위도 쉽게 읽힌다. 대기 중인 도시 블록의 빈 공간들을 오브제로 삼고 있는 이 장섭의 사진들 속에서 우리는 부단히 철거 되고 재개발 되고 신개발 되는 도시 블록화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메시지를 파악할 수 있다. 그 메시지는 도시공간의 변화를 통해서 나타나는 당대의 정치 경제 사회적 성격이기도 하고 옛 것들을 폐기하면서 새 것을 위한 새 것의 일방통행로를 달려가는 근대화의 획일주의와 그 가속도이기도 하다. 그것이 무엇이든 작가가 사진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관람자가 받아들이는 그 사진들의 메시지와 쉽게 소통된다. 그건 그 메시지가 당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보편적인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2.3. 마지막으로 남는 건 제 3의 층위이다. 이 층위는 관찰이 아니라 응시를 통해서 생성되거나 발견된다. 관찰이 보여지는 이미지와 보는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객관적 관계라면 응시는 특별한 관계이다. 그것이 특별한 건 이미지를 전체로 보는 관찰과 달리 응시는 부분에 매달리기 때문이다. 관찰이 부분들을 늘 전체 안에서 바라보고 이해하는 행위라면 응시는 특별한 부분에 집착하고 몰두하면서 전체를 바라보는 행위이다. 이 행위를 우리는 주물적 시선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대상을 관찰한다. 하지만 관찰하면서 늘 응시한다.

3. <멜랑콜리-폐허-알레고리>:

3.1. 이 장섭의 사진들은 빈터들로 가득하다. 나는 그 빈터들을 응시한다. 하지만 내가 응시하는 빈터는 사진의 외시적 이미지 층위인 빈터가 아니다. 이 장섭의 사진들이 보여주는 빈터는 비어있지만 사실은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다. 곧 지구 재개발이 이루어져 쇼핑 타운이 들어설 종로, 고층 아파트 대단지가 자리 잡게 될 잠실 재개발 부지, 경제특구법에 의해 국제자유무역 신도시가 건립될 인천 송도... 이 장섭의 사진들 속 빈터는 기획된 미래의 시간들로 기득하다. 그러나 내가 응시하는 빈터는 그 약속된 미래의 상징적 이미지들로 겹쳐지지 않는다. 그 빈터는 그 위에 존재했던 건물들이 허물어진 공간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 세워지게 될 미래의 건물들마저 미리 허물어버리는 빈터다. 그래서 그 빈터는 페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미래의 폐허다.

3.2. 폐허는 멜랑콜리의 시선 안으로 떠오르는 대도시 풍경이다. 대도시를 폐허로 바라보았던 사람들 중에는 E. 앗제와 W. 벤야민이 있다. 앗제와 벤야민은 다같이 멜랑콜리커였지만 그들이 응시했던 대도시 폐허의 의미는 다르다. 앗제가 보고 기록했던 대도시 폐허는 사라져가는 옛 파리의 모습들이었지만 벤야민이 주목했던 건 사라져가는 과거의 파리가 아니라 그 위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메트로폴리스 파리의 폐허였다. 폐허는 앗제에게 과거의 풍경이었지만 벤야민에게 그것은 미래의 풍경이었다. 그래서 대도시 파리의 폐허 이미지는 앗제에게 남겨져서 추억되어야 하는 풍경이었지만 벤야민에게 그것은 읽고 해독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간의 알레고리였다.

3.3. 알레고리는 ‘서로 화합할 수 없는 두 힘이 팽팽하게 맞서 있는 알력상태의 형식’이다 (W. 벤야민, 독일 비극의 기원). 이미지를 알레고리로 독서한다는 건 그 이미지 속에 들어있는 이 불화의 두 힘을 발견하고 그 관계를 인식한다는 걸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대도시 폐허의 이미지를 시간의 알레고리로 받아들일 때 우리가 읽어야 하는 것은 외시적 이미지가 아니라 그 이미지 안에서 맞서 있는 두개의 시간이다.

3.4. 그 중 하나의 시간은 이 장섭의 사진들 속에서 쉽게 간파된다. 근대화 초기의 구시가 종로에서 개발독재시대의 잠실을 지나 국제자본주의 시대의 송도 신도시로 이어지는 사진 오브제들의 연속성은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부단히 불고 있는 시간 - 우리가 근대화 혹은 진보라고 부르는 시간과 그 가속도를 상징한다. 하지만 사진들 속의 시간은 역사적 지명의 순서를 따라 과거에서 미래를 향해 달려도 이 장섭의 사진들이 후레임 안에서 보여주는 건 다같이 폐허를 연상 시키는 그래서 아무런 시간의 변화도 알아 볼 수 없는 텅 비어있는 블록 이미지들이다. 이 상징적으로 추상되는 진보의 시간과 외시적으로 경험되는 폐허의 이미지가 일으키는 충돌 효과 속에서 미래를 상징하는 송도 국제무역 신도시의 블록 이미지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철거를 기다리는 종로 구시가의 이미지와 하나로 겹쳐진다. 그 시각적 아이러니는 이 장섭의 사진들 속을 흐르는 상징적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향하는 진보의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미래에서 과거로 역행하는 시간임을 인식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역설적 시간의 경험 속에서 우리는 진보라고 부르는 근대화의 시간이 사실은 생산과 건설이 아니라 미래의 폐허를 향해서 달리는 퇴행의 시간임을 깨닫는다.

3.5. 그러나 이장섭의 블록 사진들 속에서 상징적 시간만이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사진들을 시간의 알레고리로 읽는다는 건 그 안에서 또 하나의 시간을 발견하고 인식한다는 걸 의미한다. “알레고리를 독해한다는 건 그 안에 쓰여져 있지 않은 것을 읽는다는 것이다” (W. 벤야민, 독일 비극의 기원), 라고 벤야민은 말한다. 마찬가지로 알레고리의 시간은 이 장섭의 사진들 안에 구체적인 공시와 상징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부재하는 시간은 이 장섭의 블록 사진들이 공시하는 진보의 시간을 폐허의 시간으로 뒤집어 읽는 멜랑콜리커의 시간 상상력을 통해서 진보-시간의 그림자처럼 함께 읽혀지는 시간이다. 상징적 시간이 부단히 흐르는 시간이라면 알레고리적 시간은 그 거센 진보의 시간 때문에 흐르지 못하고 정지당한 시간이다. 내 경우, 그 정지당한 시간을 구체적 이미지로 연상케 하는 건 특히 잠실 재개발 부지 위에 엇갈리며 찍혀있는 건설 중장비들의 바퀴자국들이다. 이 어지럽고 굵은 바퀴자국들은 물론 그 바퀴들이 지나가기 전 그 위에 존재했었던 것들을 허물어버린 힘이 남겨놓은 자국들이지만 동시에 그 힘 때문에 정지당한 또 다른 힘의 상형문자처럼 상상된다. 그리고 그 상형문자들은, 오래 응시하면, 그 공간이 블록을 위한 폐허가 되기 전 존재했었던 그 곳 장소들의 이름들과 겹쳐진다. 종루(鐘樓)가 있어 아침 저녁 울리는 종소리가 옛 서울을 깨우고 잠들게 했다는 종로, 뽕잎 먹는 누에들이 비단 스치는 소리를 내며 살이 찌고 있었다는 잠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인천송도국제자유무역신도시라는 길고 복잡한 이름의 행간 속으로 끌려 들어가 국제와 무역이라는 진보의 두 상징어 틈에 감금당한 ‘자유’라는 단어... 블록 단지 위에 어지러운 무의미한 상형 이미지들과 그 위에 겹쳐져 의미가 부활되는 이름과 단어들 통해서 우리가 발견하고 인식하는 건 진보의 시간 - 장소와 이름들이 살아있는 공간을 허물고 경제적 블록과 숫자만이 존재하는 미래의 폐허로 내달리는 그 진보의 시간 뒤에서 혹은 그 아래서 흐르지 못하는채 고여 있는 정지 된 시간이다. 자연을 공간으로 바꾸고 공간을 장소들로 숨쉬게 하면서 집단적 소원을 투사했던 공간에의 꿈과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그 공간 위로 흐르게 했던 시간을 벤야민은 역사적 시간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모두의 꿈이었지만 이제는 아무도 그 역사적 시간을 기억하지 않는다. 그 시간은 진보라는 이름으로 부단히 질주하는 진보의 시간과 도시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나날이 블록화 되어가는 도시 공간 밑에서 망각과 부재의 형식으로만 존재하면서 누군가 빛을 주고 누군가 그 빛의 이미지를 알레고리로 읽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3.6. 블록(block)은 사전적으로 두 의미를 지닌다. 공간을 지칭할 경우, 그것은 ‘현대화 된 도시 구획’을 가르킨다. 그러나 시간을 지칭할 경우, 블록은 ‘막혀서 흐르지 못하다’를 의미한다. 이 장섭의 블록 사진들은 블록 속에서 블록을 기억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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