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ays of Gardening" 작가와의 만남

2007년 4월 7일, 문신미술관 전시장 로비에서 박춘호 작가와 관객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2007년은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해입니다. 20년 전 1987년 6월 최루탄가스가 자욱하던 인사동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가졌었습니다. 이번전시가 그 후 9번을 더해 10번째의 개인전입니다. 단지 시간이 너무나도 빨리 지나갔다는 생각뿐입니다. 돌이켜보면 작업에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만큼 생각의 변화도 많았으며 정리가 되어나가는 것 같습니다. ‘표출-내면으로부터’라는 연작을 가지고 하였던 첫 번째 개인전부터 시작하여, 지금 ‘The Ways of Gardening'까지의 여정에 대하여 잠시 정리하여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10회의 개인전을 치루면서 자주 들은 이야기가 ‘작업의 일관성이 없다.’는 비판을 가장 많이 들었습니다. 더불어서 ‘표제성 및 언어성만 강할 뿐 시각예술가로서의 시각적 감성이 부족해 보인다.’는 비평도 자주 들었습니다. 아마도 87년 전시 후 미국에서 만 7년간의 체류기간 중 무의식적으로 미국 물을 많이 먹어서 그런지도 모르겠고, 실재로 미술하기에는 부적합한 감성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잠시 이해를 돕기 위해 저의 개인사를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왜 미술대학을 가게 되었나? 사실 저는 별로 미술을 선택하게 되기까지 고민이라는 것을 하여보지 않았었습니다. 6살 때 저보다 나이가 2살 위인 조카를 따라 동네 ‘미라보’라는 이름의 조그만 화실에 가게 된 것이 미술을 하게 된 결정적 계기였습니다. 그 후 초등학교입학하고 나서 ‘홍익’화실이라는 곳으로 옮겨서 마치 방과 후 놀이터에 놀러가는 것과 같이 습관적으로 다녔습니다. 중학교 때도 계속 다니고,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 대학입시를 본격적으로 준비해야한다는 주위의 권유로 인해 이대 앞에 있는 개인화실로 옮겨 입시를 준비하던 중 2학년 겨울 방학때 조소과 시험을 보는 화실선배의 두상모델을 서준 것이 개기가 되어 조소과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전공하기로 선택하였습니다. 제 기억에 초, 중, 고 12년간 화실을 빠져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흔한 집안에서 부모님과의 갈등도 없었고, 저 스스로도 초등학교 졸업할 때 즈음부터 미술대학에 가야 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을 하였었습니다.

제가 기억하기에 저는 대학에 다니면서도 별다른 고민 없이 그저 수업에 충실하고 열심히 작업을 하는 학생이었습니다. 노는 것도 학교였고 작업하는 것도 학교였습니다. 아침 9시까지 등교하여 저녁 9시쯤 하교하였습니다. 그 흔한 미대생으로서의 반항도 없었고 객기도 없었습니다. 아마 지금까지 누구에게 반항하여 본 적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당시 사회학과에 다니던 친구의 권유로 약 일 년 정도 삼양동성당에서 하는 고시야학에 나가 처음으로 저와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는 또래집단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386으로 대변되어지는 저희세대가 가지고 있었던 당시의 정서에 젖어들어 가고는 하였습니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의한 민중미술운동과 한국적 모더니즘을 표방하며 사회적 현실과는 거리를 둔 소그룹운동을 바라보면서 적지 않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과연 미술은 사회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이고 작가는 사회에서 어떤 사람인가? 그러면서도 사고의 끝까지 가보지 못하고 일에만 열심이었습니다. 좋게 말하면 성실한 학생이었습니다만, 그러나 당시 현실과 마주하고 거스를 용기가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습니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대학원을 수료하던 87년에 개최하였습니다. 629선언 직전의 인사동 제3미술관에서 최루탄 연기 속에 전시를 하게 되었는 데, 당시 서문을 김종근 선생님이 써주셨는데 지금 읽어보아도 저에게 시의 적절한 내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글의 전문은 제 홈페이지에 실려 있습니다. 전시를 마치고 그해 12월 21일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를 타게 되었습니다. 그 후 미국에 가서 90년 뉴욕의 Pratt Institute에 입학하여 다시 작업을 하게 될 때까지, 그곳 생활에서 영어를 못하는 것으로 인하여 많은 자존심구기는 일들을 겪게 되었습니다. 가장 참기 어려운 것이 영어를 못한다고 저의 지적 능력까지 우습게 보는 것이 정말 굴욕이었습니다. 갓 유학 와서 영어를 잘 못해 웃음거리가 되는 유학생들을 보면서 열 받았던 사건들도 있었습니다.

당시의 조각세미나수업이 저에게는 가장 낯설고 힘든 수업이었습니다. 3시간을 계속 작품 크리틱만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제 작업에 대하여 그들을 설득하는 것은 차치하고 이해시키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한편 문화적 차이로 인한 새로운 관점에서의 그들의 비평은 저에게는 이전에 생각하여보지 못한 작품의 접근법을 제공하여 주었고, 특히 미술사 시간에 뒤샹이후의 현대미술에 대한 역사적 맥락과 인문학적 접근을 통한 수업내용은 현대미술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당시 PS1에서 흑인작가인 데이비드 헤몬스 David Hemmons 의 전시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지금도 기억이 나는 작품이 ‘코케인’이라는 작업인데 맹인용 지팡이와 코카콜라 캔을 이용한 일종의 pun작업이었습니다. 우리식으로 이야기하면 그는 민중미술작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의 생활은 마치 지금의 한국사회와 일면 유사한 분위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그들의 다양한 사회적 이슈로 분열된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고, 해체되는 가족 관계 등 모든 것이 지금의 한국사회와 너무나도 유사한 점이 많다고 생각하며, 특히 얼마 전 재혼을 위해 자기 자식을 죽인 사건보도를 보면서 94년 미국에서 벌어졌던 사건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면서 놀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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