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ays of Gardening" 작가와의 만남

포스트 모더니즘적 사고인 ‘모든 것이 가치가 있고 그리고 존재하는 것은 상대적 가치뿐’이라고 할 때 절대적으로 다시 대두되는 것이 가치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궁극에 가서는 가치의 문제로 귀결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상대적 가치만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인간은 어느 때 보다도 사유와 토론에 더욱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야 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합리적 의사소통 - 반론의 여지가 많습니다만 - 이라는 과정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과정이 없이는 다문화주의의에 내포되어있는 문화상대주의의 부정적인 측면인 가치의 혼돈이라는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결과적으로 냉철한 비평에 의한 처절한 선택과 배제가 그 어느 때 보다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귀국 후 광주비엔날레를 시작으로 미디어시티 2000까지 한국미술계에 대규모 비엔날레 열풍이 몰아닥쳤습니다. 그러면서 대규모 국제비엔날레를 세 개나 개최하는 문화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 해 비엔날레 3건 개최할 역량 있는가” 프랑스 ‘디종 컨소시엄’ 디렉터 ‘한국 미술계에 고언’이라는 제목의 2002년 10월 3일자 조선일보기사를 보며, 왜 이러한 기사가 프랑스인에 의해 써져야 하는가에 대해 자문해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은 가치의 문제에 직면하여 비평의 중요성과 더불어 기원에 대한 문제를 역사적으로 고찰하여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매체 medium 를 사용한다는 것은 누군가와의 소통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미술가는 시각적 이미지를 생산하기 위해 다양한 매체를 사용하며 작품을 제작하며 결과적으로 작품은 매개물로서 전시장에서 관객과 소통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과 같은 개념의 미술은 아니지만 원시시대의 동굴벽화들의 이미지생산자들이 무당이었다는 것은 시사 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역사적으로 마술사이면서 무당이었던 원시미술가들의 사회적 위치가 현대의 창조적 미술가로 변화하여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부와 명예를 함께 누리는 사회적 명사로 인정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고찰하여 봤을 때 변하지 않은 것은 그들에 의해 생산된 작품을 통하여 관객과 소통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마도 이것이 미술 행위의 불변의 본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국현실에서 미술계의 활성화는 곧 미술시장의 활성화이고, 미술시장의 활성화 정도가 문화선진국의 척도역할을 하는 것으로 암암리에 인식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스페인에서 아르코 아트페어가 성황리에 끝마쳤습니다. 신문 기사 머리글도 “스페인 홀린 한국미술 ‘대박’ - ‘아르코’서 아트페어 참가 사상 최대 매출, 국내 화랑 15곳, 319점 24억 원어치 판매”라고 대서특필하였습니다. 그와 더불어 연초에 ‘5개화랑 투자 모여 100억대 스타아트펀드 출시’ 라는 신문기사에서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위에서 살펴본 것과 다른 원인에서의 가치의 기원에 대한 문제입니다. 물론 피카소 - ‘피카소 만들기’라는 책에 잘 나와 있습니다 ― 같은 거장도 이러한 현실적 삶의 문제로 많은 고민을 하였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오상길씨가 쓴 ‘비평가여 내 칼을 받아라.’를 읽어보면서 한국현대미술에 대한 뿌리의 문제와 푸코 Michel Foucault 의 권력의 문제를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1957년인가를 한국현대미술의 기점으로 잡는 것에 대한 끊임없는 오상길씨의 문제제기는 푸코의 권력의 문제로 귀결시켜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작 한국현대미술을 이야기할 때 과연 한국의 모더니즘의 계보 및 기점설정에 대한 새로운 문제의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0세기 초 타의에 의한 전통으로부터 단절의 역사를 경험한 한국인에게 과연 서구적 모더니즘의 전통이 있었는가는 진부한 화두이기는 하지만 과연 그러한 계보의 부재 속에 덕수궁 미술관에서 전시된 모 작가의 작품을 가지고 현대미술의 기점을 설정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외형으로 현대미술을 논할 것인지 아니면 정신적인 것을 가지고 현대미술을 논할 것인지 다시 한 번 진지하게 고민을 해봐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외형상 동시대성의 획득에 대한 강박관념은 지금도 유령과 같이 우리의 주위를 맴돌고 있는 것입니다. 서구의 아방가르드가 부르주아문화에 대한 저항이었다면 우리가 그러한 저항의 대상 자체를 가진 적이 있었나 다시 한 번 고찰해 봐야 될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저의 작업은 메타적인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전시장에 “The Ways of Gardening"이라는 제목의 전시를 하고 있습니다. 전시제목은 죤 버거의 책 ”The Ways of Seeing"에서 차용한 것입니다. Garden이라는 단어가 저에게 주는 두 개의 상이한 청각이미지의 차이는 아마도 관객 각자에게는 또 다르게 작용하리라 생각합니다. 일단 두 가지 제시되어진 비디오와 식탁의 대비를 통해 그 의미를 어떻게 생성할 것인가는 절대적으로 관객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작품을 본다는 것도 머리아픈일입니다.
저는 작업에 있어서 형식적인 일관성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항상 그때 그때 제가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에 적합한 매체를 찾아 나섭니다. 다음에 전시를 하게 된다면 어떤 매체를 이용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내용과 형식을 구별한다면 내용을 먼저생각하고 형식을 찾아 나섭니다. 그래서 내용이 바뀌면 형식은 자연스럽게 바뀌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작업이 중구난방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 같습니다.

지루한 이야기 경청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가 : 박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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